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 – 시공 디스커버리 002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 – 시공 디스커버리 002 권에 대한 독서 후기 및 주요 문구 입니다.
독서 후기
이집트는 참 매력적이다. 중동인가 하면 아프리카 같고, 동시에 유럽같기도 하다. 별생각 없이 거기 사는 사람을 생각해보면 중동 사람들인 것 같기도 하고, 백인인가 싶기도 하고…
B.C. 3,000년경부터 초기 왕조시대를 열었는데 그 기록과 유물은 유럽이 거의 다 갖고 있다.
안타깝다고 해야할지…
도둑은 어디서부터 도둑인가…
고대 이집트의 찬란한 영광은 후세의 사냥터가 되고 말았다. 도굴꾼들이 끊임없이 피라미드며, 신전을 도굴한 것이다. 이집트의 도굴꾼들이 도굴하면 그나마 이집트 내에 있으니 괜찮으려나 했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의 유물들을 마구 약탈했다. 도대체 이 두나라는 빠지는데가 어디야?
마예는 19세기에 이집트 고대유물을 약탈하여 유럽의 대형 박물관에 실어 보내는 일에 앞장섰던 악명 높은 이집트 주재 영사들의 대선배였다.
P.33
그러나, 선조들의 유산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오히려 영국과 프랑스가 그렇게 약탈한 덕분에 그 유물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알게 되고, 로제타스톤을 통해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도 해석할 수 있게되고, 이집트 도굴꾼들에 의해 녹여져 그냥 금덩어리가 될 뻔한 유물들을 살려낼 수 있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그 유물들이 댐으로 수장되는 것을 유네스코가 건져내는 아이러니..
1956년, 이집트 정부는 새로운 댐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공사는 나일강 연안에 위치한 누비아 지역의 모든 유적과 유물을 파괴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유네스코는 중대하고도 절박한 위험을 앞두고 1960년 3월 8일 누비아의 유적과 유물을 구하기 위해 범세계적 운동을 전개했다.
P.174

1822년 9월 14일, 마침내 샹폴리옹은 이집트어가 표의문자인 동시에 표음문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P.94
이집트의 왕은 파라오이고, 파라오 하면 생각나는 두 단어. 람세스와 투탄카멘(투탕카멘)..
고대 이집트는 B.C. 3,200년경부터 B.C.341년 페르시아에게 지배를 받기 전까지 30개의 왕조가 있었다.
투탄카멘은 이집트 제18왕조의 이름없는 왕이었고, 람세스는 제19왕조의 8명의 왕중에 두 명(람세스 1세, 2세)이다. 투탄카멘은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왕이었던 덕분에 근대에까지 도굴되지 않고 무사히 발견될 수 있었다. 그렇게 온전하게 발견된 덕분에 가장 유명한 파라오가 되었다. 이것도 아이러니..
표면을 석회로 입힌 입구에는 지하묘지를 경비하던 사람들의 관인과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파라오 투탄카멘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P.116

길이 22m가 넘고 225톤이나 되는 오벨리스크를 한개의 화강암을 깎아 만들고, 피라미드를 쌓아올리고, 스핑크스를 만들고, 산을 깎아 신전을 만들고 20m가 넘는 거상을 조각하고…
일견 위대해 보이는 이 업적들은 틀림없이 백성들을 동원해서 만들었을 것이다.
곰브리치 세계사에서는 노예처럼 부려서 만들었다고 하고, 에피소드 세계사에서는 나름 현대처럼 복지제도가 갖춰진 가운데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지만 어찌되었든 백성들이 (풍족한 시대도 아니었을 텐데)생업에 종사하지 못하고 노동력을 파라오의 무덤을 만들거나 신전을 만드는데 동원된 건 사실이다.
때로 우리나라에는 왜 그런 거대 건축물, 꼭 피라미드가 아니더라도 파르테논 신전이나 원형경기장, 만리장성 같은 위대한 유산이 없냐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지만 어쩌면 우리나라 역사 속의 왕들은 그런 위대해 보이는 업적에 관심이 없었기에 백성들이 그나마 덜 고생했을 수도 있겠다.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 : 주요 문구

제1장 사라진 이집트, 파라오 시대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이교도 신전을 모두 폐쇄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 무렵 이집트에는 전통적인 신이나 여신을 신봉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신전의 폐쇄는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때까지 그곳 주민 사이에 쓰이던 상형문자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P.13
제2장 고대의 여행자
다른 민족의 경우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장례기간 동안 머리를 삭발하지만, 이집트인은 오히려 수염과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내버려 둔다.
P.21
동물을 신성시했던 이집트인은 계속되는 가뭄에도 동물을 잡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고기로 연명했다.
P.22
제3장 나일강을 따라 몰려오는 십자군, 수도사, 관광객
프랑스 총영사 브노이 드 마예는 많은 이집트 고대유물을 루이 14세에게 보냈다. 마예는 19세기에 이집트 고대유물을 약탈하여 유럽의 대형 박물관에 실어 보내는 일에 앞장섰던 악명 높은 이집트 주재 영사들의 대선배였다.
P.33
만일 이집트가 예술을 사랑하는 국가에 통치되었다면 이집트는 다른 지역에서는 결코 줄 수 없는 고대유물에 대한 무궁무진한 소재를 제공했을 것이다. 나일강의 델타 지역에서는 이제 중요한 유적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주민들이 필요에 의해서, 혹은 미신 때문에 모든 유적을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다.
P.39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케옵스의 거대한 피라미드뿐이다.
P.41
제4장 탐험가와 도굴꾼
이집트인이 시작한 약탈은 로마와 비잔틴 황제들로 이어졌다. 오벨리스크, 스핑크스, 조상 따위 역사적 기념물은 제국의 수도로 옮겨져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P.58
신전을 교회로 개축하거나 바위를 뚫어 만든 무덤을 차지했던 콥트파 수도사나 은둔자도 약탈자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유적을 파괴하거나 손상했으며 벽화와 부조를 알아볼 수 없게 마모시켰다.
P.59
영사들은 우선 피르만(발굴 허가서)을 발급받은 후, 일확천금을 꿈꾸며 이집트에 온 외국의 모험가들을 고용했다. 영사에게 고용된 모험가들은 영사의 이름으로 유적을 발굴하거나 골동품을 사들이고는 현지에서 빼돌렸다.
P.61
19세기 초에 행해진 고대유물의 약탈은 분명 수치스러운 행위였지만, 어떤 면에서 그것은 오히려 파괴될 뻔했던 많은 유물을 구해 낸 행위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1810년에서 1828년 사이에 13곳은 신전이 파괴되었는데, 그 신전 건축에 사용되었던 돌들은 공장을 짓는 데 사용되었거나 용광로 속에서 녹아 버렸다. 그리고 많은 조상과 얕은 부조가 같은 운명에 놓여졌다.
P.82
제5장 학자의 시대
그(피에르 부샤르)는 인부들이 부수고 있던 오래된 벽 내부에 새까만 돌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돌에는 문자가 가득 담겨 있었다. -중략- 비석의 위 부분에서는 상형문자 문장, 가운데 부분에서는 아랍어로 보이는 초서체 문장, 그리고 아래 부분에서는 그리스어 문장을 볼 수 있었다.
P.88
1822년 9월 14일, 마침내 샹폴리옹은 이집트어가 표의문자인 동시에 표음문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P.94
제6장 이집트를 구하려는 고고학자
이집트의 오리는 매우 위험합니다. 오리 부리에 물리면 평생을 이집트 연구에 바칠 수밖에 없는 열병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P.102
마침내 그들은 산허리에 있어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데이르엘바하리의 넓은 방과 통로에 미라들을 숨겨 놓았다. – 중략 –
P.111
그렇게 많은 미라가 숨겨 있던 데이르엘바하리에는 왜 부장품이 그다지 많지 않고, 금으로 만들어진 유물은 전혀 없는가? -중략- 사제들이 미라를 옮겨 놓기 훨씬 전에 이미 금은으로 만든 유물은 도굴범의 도가니 속에서 녹아 버렸던 것이다
제7장 이집트 재발견
1922년 11월 4일, 지하로 연결되는 돌계단이 발견되었다. -중략- 표면을 석회로 입힌 입구에는 지하묘지를 경비하던 사람들의 관인과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파라오 투탄카멘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P.116
(나폴레옹의) 무모한 이집트 원정은 세계의 모습을 적지 않게 변화시켰다. 이를 계기로 잊혀졌던 신비로운 이집트 문명이 다시 빛을 발하게 되었으며, 고대 이집트와 그 언어를 연구하는 이집트학이 탄생되었다.
P.130
기록과 증언

“병사들이여! 4,000년의 역사가 그대들을 지켜보고 있다.”
P.134
오벨리스크는 모노리트이다. 다시 말해 화강암 덩어리 한 개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중략-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문자의 숫자는 모두 1,600자이고, 위에서 아래로 읽는다. 오벨리스크의 길이는 22m이고, 무개는 225톤이다.
P.146
3,700년이라는 세월도 원래의 모습을 변화시키지 못했고, 입구를 가로질러 돌로 쌓아 올린 벽의 회벽 표면에는 아직도 이집트인의 손바닥 자국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남아 있었다. 또 현실의 한편 모퉁이에 평평하게 덮여져 있는 모래 위에도 맨발의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P.164
람세스 2세는 무려 30세기 동안이나 시간과 공간을 여행한 끝에 마침내 카이로 박물관에 자신의 거처를 정했다.
P.190
최근까지는 이집트의 고대유물 관리국이 발굴된 유물을 분배하는 역할을 했다. 고대유물 관리국은 원하는 유물은 이집트가 보유하도록 하고, 발굴을 한 사람에게는 일정한 수의 기념비나 유물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P.205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
장 베르쿠테 저 / 송숙자 역
1799년, 알렉산드리아 인근 로제타. 프랑스 육군 중위가 흑색 현무암 비석을 발견하였다. 비석에는 같은 내용의 문장이 세 가지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 나폴레옹을 수행했던 학자들은 이 비석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로제타 스톤이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